[해를 품은 달] 배움의 자세

2012/02/06 19:26 | Posted by Rkakd
정답이 저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장난이 되는 것이옵니까?
경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는 저급한 것이 되는 것이옵니까?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면
세상 만물 모두가 문제가 될 수 있고
세상 만물 모두가 그 답이 될 수 있는 것이옵니다.

배움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정답을 안다고 자만하는 오만이옵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잣대로만 사물을 판단하는 편견이옵니다.

오만편견이 저하의 눈과 마음 모두를 어둡게 하고 있음을
깨달으셔야 하옵니다.

배움에 임하는 자세부터 바르게 하시옵소서

- 해품달 2회 이훤과 허염이 논한 배움의 자세 -



어느 정도 관찰이 자연스러워지게 되면 
다시 익숙함이 되살아나면서 '안다' 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만
항상 관찰 속에 깨어 있는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겠지요.  

"시크릿" 되새김질 (2)

2011/08/16 19:20 | Posted by Rkakd
이전에 작성해 두었던 글을 숙성 시킨 후에 다시 읽어 보면 스스로 부족함을 알게 됩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가 암이란 큰 병을 진단 받고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락을 받았을 때, 제 심장이 평소 보다 더 갸날프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한 마디로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전율을 느꼈던 것이지요.

병문안을 갔을 때, 친구 침대의 한 켠에 놓여진 책이 바로 '시크릿' 이었습니다. 친구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긍정'의 에너지를 일깨우기 위해 가져다 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써 놓은 글을 보니 좀 더 서술할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전에 쓴 "시크릿" 되새김질 글에서는 실제적인 예시가 없이 제 느낌을 적었습니다만 이번 글에서는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요금/세금 고지서는 수표책이다 ?

책에서 소개한 사례 중에 각종 고지서를 받았을 때를 설명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 속 주인공(?)은 해당 고지서를 고지서가 아닌 자신의 (미래에 벌어 들일 돈의) '수표책'이라고 여긴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지서를 바라 보는 그의 태도 자체는 어떨까하는 질문을 해 봅니다.

긍정적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인가요? 


고지서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태도는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지서(사실,fact)'를 '수표책(허상)'이라는 다른 존재로 바꿔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본인의 마음 속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요? 고지서란 것은 나쁜 것이니 회피하고 싶은 심리인 겁니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고지서'란 것은 나쁜 것인가요? 아니면, 좋은 것인가요?

 
 이 물음에도 속임이 있습니다.

'고지서'란 것은 내가 사용한 것에 대해 부담해야 하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기에 '좋다'거나 '나쁘다'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고지서는 나쁜 것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를 무마하는 반작용으로서 '가짜 수표책'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생각일까요?

만약, 부정적인 '고지서' 이미지가 없었다면 '수표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 필요 조차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불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눈치 채셨는지요? 

두 번째,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가?

책에 있었는지 기억은 없습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부분 원망하는 것이 큰 병이나 커다란 좌절을 경험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왜 이리도 중한 병이 나한테 온거지?  
나처럼 착하게 살아 온 사람에게 오지말고 다른 나쁜 사람에게나 갈 것이지 말이야!


자연을 돌아 보면 그 대답을 알 수 있습니다. '생노병사'란 것이 어떤 특정한 존재에게만 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자연의 것들을 통해 배웁니다. 그렇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 여기다 보니,개인적인 괴로움이 따라 옵니다. 병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올 수 있습니다. 개인별 생활 양식의 차이로 인해서 발병하고 안하고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만 기본적인 자연의 이치에서는 병이란 것도 자연스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자께서는 네가 큰 병에 걸려 보지 않아서 그런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네..저도 사람인지라 크게 아프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아픈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아프면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겁니다. 하지만, '사실'을 다른 것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있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것이 병을 치료하지는 못할지라도 심적 고통을 늘이지는 않을 것임을 압니다. 병들어서 아픈 것에 더해서 자신이 겪지 않을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또한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고통(사실)을 받아 들인다면 사실을 부정하는 생각이 없기에 심적인 고통도 없을 것이란 것이 합리적인 생각이 아닐런지요?

'사실'은 있는 그대로임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회사에서 받은 가을 추천 도서 중 한 권인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법정 스님은 이제 계시지 않습니다만 스님께서 남겨 두신 향기로운 가르침은 
나를 성찰하고 깨어 있도록 해 줍니다.
마음 공부를 하시는 선승분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가르침 중 하나가
'놓아버리라'는 말입니다. 

놓아버린다.

무슨 뜻인지 잘 압니다.
(안다고 하고 모른다고 헤아립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아침 출근 길에 문득 떠오른 단상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느 쪽을 더 놓아버리기 쉬울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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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질문에 속임이 있음을 알아채셨습니까? 후후...
내 마음 속에서 이러한 비교나 판단이나 생각이 있는 한
절대로 ''는 그 어떤 것도 놓아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입니다.

바로 이것이 '걸림'이 아니겠습니까?

걸림을 만드는 것은 '집착'입니다.
'날 것' 그대로인 것[자연]에 다른 형상, 다른 생각을 집어 넣어서
오히려 마음을 번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대로 듣지 않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그리 해석하고)
그대로 느끼지 않습니다. (싫은 것은 거부합니다.)

자신의 내부를 살펴서(관찰/경청),
쓸데 없는 것(망상/허상/판단)에 정력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알아채는 것만으로 집착으로 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습니다.
진정으로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집착하는 마음이 드는지를 또한 살피고 있다면
이 또한 무한히 반복될 고통의 시작입니다.

알아채는 것은 순간이고, 저절로 일어납니다.
저절로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주간 업무 회의를 진행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프로젝트 진행이 잘 않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늦어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마냥 기다리지 말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분들끼리 적극적으로 협의를 해서 일정안에 끝내야하지 않겠냐고 하였습니다.

내용으로만 보면 문제가 없다고 느끼실지 모르시겠지만
당시 회의를 끝내고 나서 뭔가 마음 속에 꺼림직한 느낌이 계속 들었습니다.

'목소리 톤이 평상시 보다 좀 더 높지 않았나?'

'듣고 있는 담당자가 거북한 것 같았는데?'

'일방적으로 업무를 강요한 것은 아닐까?'

등의 느낌이었습니다. 
내 자신이 담당자라면 싫어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들이었지요.

 * 회의 때의 느낌:

 '그 일을 하기 싫어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왜 빨리 빨리 진행하지 않는 것이죠?'

 '이번 일이 일정대로 되지 않는 것은 바로 당신 책임이고
  그 때문에 우리팀 평가도 좋지 않을거야!'

* 실제 전달하고자 한 의미: 

'프로젝트를 정해진 일정내에 끝내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현재는 일정대로 가고 있지 못하고 있는것 같아서
제 마음이 불안불안하고 조바심이 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팀간 협의, 추가 인력 투입 또는 상시 업무 조정 등등)

결국, 정해진 일정대로 업무를 완수해서 좋은 평가(칭찬)를 받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한 제 자신이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회의 때에는 '남 탓(비난,책임 전가)'을 하고,
담당자를 질책하는 모습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담당자에게는 바로 다음날, 의미 전달을 잘못한데 대해서 사과를 하고,
실제 제가 느끼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내서
다른 분께 정확하게 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았습니다.

또, 내 자신을 정직하게 관찰함으로써
보다 쉽게 내가 바라는 바를 알아낼 수 있음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습니다.

[폭력] '본보기를 보이다'

2010/08/12 09:11 | Posted by Rkakd
  오늘 아침 기사 브리핑에서 나온 이야기 입니다.
중앙대의 "기업식 구조조정" 에 항거(?)했단 이유로 징계(퇴학)를 받은 학생들이 소송을 걸고,
동문 변호사가 이를 지원하려고 했더니 학교측에서 이들 변호사들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이들 학생을 "본보기" 삼아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본보기:
[명사]
1. 본을 받을 만한 대상. ≒범본2(範本).
2. 어떤 사실을 설명하거나 증명하기 위하여 내세워 보이는 대표적인 것. ≒궤칙, 보기1, 본1, 패턴.
3. 어떤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대표로 내세워 보이는 것.
4. 본을 보이기 위한 물건.
 
  국어 사전에 나온 단어의 뜻입니다. 사실, 의미 자체에는 그 어떤 부정적 의미나 폭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좋은 의미, 즉, '선례'나 '역할 모델(Role model)'과 유사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이런 사전적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즉, 기득권자가 다른 대중을에게 공포감을 심어서 자신들의 의지에 맞추어 편히 다루려는 의도를 나타낼 때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물론, 본보기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이런 의도가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 조차도 알아채지 못하겠지요. 보고도 못본척,듣고도 못들은척 하면 편히(?) 살 것이요 괜히 나섰다가는 이와 같이 당할 것이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은 공포심에 눈을 감게 됩니다. 또한, 공포심은 전이되는 것이어서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고,지혜의 눈을 깨지 못하게 하고, 현실에 순응한 채 숨죽이고 살게 합니다. 마치, '이끼'란 영화에 나온 대사 마냥 바닥에 딱 붙어서 살란 이야기죠.

  그러나,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등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권력이란 것이 다른 사람들이 잠시 '위임'을 해 준 것이지 자신이 '소유'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사안이지요. 자신은 남보다 우월한 존재고, 거기에 반대하는 존재는 가차없이 본보기로 삼아서 제거해야 한다고 하는 당위성!! 무서운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예로써 법의 집행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집행 편의성을 중시하다 보니 몇 사람만에게만 "본보기"로써 강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라 느끼지는 않는지요?

  우리 생활에서도 이런 공포심 조장용 '본보기'가 얼마나 많이 있을지를 돌아봅니다.

[참고] 중앙대 “퇴학생 소송 도우면 교내 고시생 지원 끊겠다”
"도를 넘은 학생들의 행동에 대해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모습입니다.
하지만, 오늘 겪은 일을 잘 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대로 가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2년 전, 팀장을 할 생각이 있냐는 상사의 질문에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 씨앗이 되어, 실제로 팀장을 시켜 달라고 한 것이 작년 이 맘 때 쯤이었습니다. 상사는 당연히 2년 전 제가 한 말을 상기하셨는지 팀장을 시켜주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1년 여를 이 팀, 저 팀으로 팔려다녔습니다. 속칭, '정치'라는 행위를 하지도 않았고, 업무 성과가 남보다 특출나게 뛰어나지도 않았던 저 입니다만 오늘자로 팀장 발령을 받았습니다.

  상사께서 그러시더군요. "딱 1년 만이지?" 라고... 팀장 시켜달라고 한 때 이 후로 말이지요.
제가 잘나서 팀장이 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상사가 이뻐해 주셔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제 상사들께서 논의를 거쳐서 결정을 하신 것이겠지요.
아마도, 여러 후보군이 있었을 겁니다. 왜 저로 결정하셨는지는 물어보지 않았고, 물어보지도 않겠습니다만 이 모든 것이 제가 바랬거나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제 자신도 참 신기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이건 모두 '신께서 준비하신 일'이 되겠지요?
저도 종교가 있지만 제게 오늘 일어난 일을 신께서 준비하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미 '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사람의 뇌는 보이는 것을 보는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하네요.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날것이 주는 행복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TAG 자연, 행복
  지난 번 글에서 '나'라는 것이 해체되고 남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http://goo.gl/NHAA). 글의 말미에 '나'를 허상이 아닐까 했는데 왜 허상이라 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기억할 수 있을만큼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도 과연 '나'라는 것이 존재했는지 기억나시는지요? 저는 물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회과학적인 탐구를 통해서나 다른 학문을 통해서 밝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분야도 아니고 그런 탐구 방법이나 진실 해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글의 주제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 라는 중심성(?)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나이를 먹고, 지식 창고가 넓어짐에 따라 '나' 도 같이 굳건해져 왔습니다.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 보면, '나' 라고 인지했던 '그 어떤 시기' 이 전에는 순수한 삶의 본능에 의해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동물과 같은 상태였겠지요. 배 고프면 먹고, 마시고, 졸리면 자고, 생리적 부름에 응답하는 정말 단순한 생활의 반복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라는 인지가 생기기 시작하면 달라지게 됩니다. 다양한 사회 규범이나 생활 양식, 교육 내용과 수준, 주변 환경 등등에 따라서 조금씩 껍데기가 하나씩 들러 붙게되지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껍데기는 점점 두꺼워지고,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와 '나를 둘러싼 것'과 다른 것들은 철저하게 배제하기 시작합니다. 소통이 끊긴 상태, 배움이 중단된 상태로 변하는 겁니다. 늙으면 고집만 남는다는 말이 그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꺼워진 껍데기를 뚫고, 인간, 아니 만물의 원래의 모습인 '자연의 진정한 모습'으로 나아가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눈사람 만들때를 생각해 보지요.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 뭉치를 만들어야 할 때에는 작은 눈 뭉치을 만든 다음, 눈 밭을 오가면서 그 눈뭉치를 계속해서 굴리면 다른 눈이 붙고, 붙여서 큰 눈 뭉치를 만듭니다. 하지만, 기온이 올라서 그 눈이 녹으면 어떻게 되나요? 결국에는 '눈의 원래 모습인 자연 상태의 물'로 돌아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눈'이라는 물의 다른 모습이었던 때의 흔적조차 남지 않습니다. 눈은 물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눈'의 실제 모습은 '물'일 뿐이요, 물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이지요. 하지만, 물이라는 사실은 잊고서 '눈'에 대해서 집착하게 됩니다. 마치 영원할 것 처럼 말이지요.

  이처럼, '나' 라는 두꺼운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내고,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마음 공부를 하다 보면 원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좀 더 몀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라고 인지했던 모든 것이 '눈'과 같이 실제로는 진리의 다른 형태일 뿐이요, 봄이 오면 없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덧없이 사라질 '나' 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고통이고, 무지한 일임을 스스로 깨닫고, 진리(순리)에 맞추어 사는 것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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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공부를 하면서 가끔씩 '나'란 인식이 없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아니, '나'란 인지를 강하게 하는 것의 반증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전에는 이 '나=ego'가 사라지는 것이 '나란 존재' 자체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습니다만 이것 또한 실상이 아니었음을 눈치챘지요. 그 이 후에도 가끔씩은
'나'란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 지내오다가 문득 연말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케익을
계기로 해서 '나눔' 을 알게되었습니다.

  '나눔'이란 것이 '내가 가진 것을 나눈다'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아니란 것을 안 것입니다. '나눔' 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게 아니고
'나'가 사라지고 남는 진실한 모습이었습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나의 중심을 벗어난
'우리'로 향하는 것. 그것이 진실한 '나눔'입니다.

   '나=ego'가 사라짐으로써 외부로 나타나는 것이 나눔이라면
 내면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고 잘 바라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진리'였습니다. 자아를 찾는 분도 계시지만 '나' 자체가 허상일지니
그것이 사라져서 나타나는 것이 '또 다른 나' 일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나' 는 '나의 의지' 로는 결코 없애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일 겁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기를 간구하는 것이겠지요.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해를 돌아보면 역시나 여기 저기 '불통'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용산 참사', '미디어 법 날치기 통과 시도', '4대강 사업 추진','무상 급식 예산 삭감' 등등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여기 저기서 아픔이 느껴진 한 해였습니다.

  2010년에는 이런 '불통'의 시대를 조금이나마 '소통'의 시대로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대화'가 무엇이고 '소통'이 무엇이라고 잘 아시고 계실 겁니다.
'대화' 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내' 가 '다르지만 또 같다' 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바탕에서 서로의 합의할 수 있는 부분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다르다'는 것은 대화를 하는 목적을 바라보는 상대방과 나의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고,
'같다'는 것은 서로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대화 상대의 이익을 좀 더 가져오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극한으로 가는 것이 바로 '경쟁'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쟁'으로는 서로가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눔'. 이것이야말로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진정한 길입니다.한정되어 있는 자원을 지혜롭게 나눔으로써 우리 모두가 같이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나누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대화를 하고 소통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하겠습니다.

  대화를 하자고 하면서 이미 내린 결론을 들이밀면서 동의하라는 식의 대화 는 지양해야 하는 '폭력'입니다. 그것이 폭력이란 사실 조차 모르는 분들이 많으셔서 안타깝습니다. '좋은일인데 왜 동의하지 않느냐?' 는 식의 반론을 하는 분들을 보시면 서글퍼집니다. 나이는 벼슬이 아니라고 하는데 나이가 먹어도 조금도 어른이 되지 않는 분들입니다.

  우리 모두 조금 더 성숙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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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대화, 소통

"시크릿" 되새김질

2009/12/23 08:33 | Posted by Rkakd
'긍정' 이란 말을 들으니까 이전에 읽었던 '시크릿(Secret)' 이란 책이 기억납니다. 그 책이 베스트 셀러로 세간에 너~~얼~~리 읽혀졌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하는 "표면적인 주제"가 바로

"긍정적 사고"를 하면 그 생각대로 이루어지더라.

가 아니었나요? 하지만, 책이란 것이 잘못 읽히면 이 보다 더한 독이 없다는 생각을 해 준 최초의 책이 이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분들이 읽고, 좋은 책이라고 한 책을 저는 왜 ""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바로 오늘 되새김질해 보는 이유입니다.
  사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 책에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괴로운 현실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그 결과로서 당연히 얻어지는 것을 마치 요즘 휴대폰 회사의 광고 문구처럼

생각 대로 ~



하기만 하면 마술램프처럼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읖조리고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 인 사고 방식을 갖고 산다는 것은 좋은 자세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우주적 차원에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자연의 섭리란 것이 부정적인 에너지와 긍정적인 에너지가 각각의 유사한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 모이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가짜 긍정" 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감나무에서 감이 뚝하고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짜 긍정" 이 주는 문제점은 출발점이 틀리기에 그로 부터 파생되는 과정이나 결과까지 잘못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쓰레기장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꽃씨는 양질의 토질에 심어야 향기롭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진정한 긍정"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실을 정직하게 바라 보는 것', 즉, '관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관찰을 통해서만이 진정하게 바랄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모을 수 있고, 그것을 시작으로 한 나아감만이 진정하게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긍정의 의미마저도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이런 가짜 논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단히 깨어있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긍정 자체가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에 '진정하다' 는 둥 '가짜'라는 둥의 단어를 덧붙일 수 밖엔 없네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정한 것이 무엇이고 가짜가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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