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본보기를 보이다'

2010/08/12 09:11 | Posted by Rkakd
  오늘 아침 기사 브리핑에서 나온 이야기 입니다.
중앙대의 "기업식 구조조정" 에 항거(?)했단 이유로 징계(퇴학)를 받은 학생들이 소송을 걸고,
동문 변호사가 이를 지원하려고 했더니 학교측에서 이들 변호사들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이들 학생을 "본보기" 삼아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본보기:
[명사]
1. 본을 받을 만한 대상. ≒범본2(範本).
2. 어떤 사실을 설명하거나 증명하기 위하여 내세워 보이는 대표적인 것. ≒궤칙, 보기1, 본1, 패턴.
3. 어떤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대표로 내세워 보이는 것.
4. 본을 보이기 위한 물건.
 
  국어 사전에 나온 단어의 뜻입니다. 사실, 의미 자체에는 그 어떤 부정적 의미나 폭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좋은 의미, 즉, '선례'나 '역할 모델(Role model)'과 유사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이런 사전적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즉, 기득권자가 다른 대중을에게 공포감을 심어서 자신들의 의지에 맞추어 편히 다루려는 의도를 나타낼 때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물론, 본보기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이런 의도가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 조차도 알아채지 못하겠지요. 보고도 못본척,듣고도 못들은척 하면 편히(?) 살 것이요 괜히 나섰다가는 이와 같이 당할 것이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은 공포심에 눈을 감게 됩니다. 또한, 공포심은 전이되는 것이어서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고,지혜의 눈을 깨지 못하게 하고, 현실에 순응한 채 숨죽이고 살게 합니다. 마치, '이끼'란 영화에 나온 대사 마냥 바닥에 딱 붙어서 살란 이야기죠.

  그러나,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등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권력이란 것이 다른 사람들이 잠시 '위임'을 해 준 것이지 자신이 '소유'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사안이지요. 자신은 남보다 우월한 존재고, 거기에 반대하는 존재는 가차없이 본보기로 삼아서 제거해야 한다고 하는 당위성!! 무서운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예로써 법의 집행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집행 편의성을 중시하다 보니 몇 사람만에게만 "본보기"로써 강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라 느끼지는 않는지요?

  우리 생활에서도 이런 공포심 조장용 '본보기'가 얼마나 많이 있을지를 돌아봅니다.

[참고] 중앙대 “퇴학생 소송 도우면 교내 고시생 지원 끊겠다”
"도를 넘은 학생들의 행동에 대해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모습입니다.
하지만, 오늘 겪은 일을 잘 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대로 가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2년 전, 팀장을 할 생각이 있냐는 상사의 질문에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 씨앗이 되어, 실제로 팀장을 시켜 달라고 한 것이 작년 이 맘 때 쯤이었습니다. 상사는 당연히 2년 전 제가 한 말을 상기하셨는지 팀장을 시켜주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1년 여를 이 팀, 저 팀으로 팔려다녔습니다. 속칭, '정치'라는 행위를 하지도 않았고, 업무 성과가 남보다 특출나게 뛰어나지도 않았던 저 입니다만 오늘자로 팀장 발령을 받았습니다.

  상사께서 그러시더군요. "딱 1년 만이지?" 라고... 팀장 시켜달라고 한 때 이 후로 말이지요.
제가 잘나서 팀장이 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상사가 이뻐해 주셔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제 상사들께서 논의를 거쳐서 결정을 하신 것이겠지요.
아마도, 여러 후보군이 있었을 겁니다. 왜 저로 결정하셨는지는 물어보지 않았고, 물어보지도 않겠습니다만 이 모든 것이 제가 바랬거나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제 자신도 참 신기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이건 모두 '신께서 준비하신 일'이 되겠지요?
저도 종교가 있지만 제게 오늘 일어난 일을 신께서 준비하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미 '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사람의 뇌는 보이는 것을 보는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하네요.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날것이 주는 행복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TAG 자연, 행복
  지난 번 글에서 '나'라는 것이 해체되고 남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http://goo.gl/NHAA). 글의 말미에 '나'를 허상이 아닐까 했는데 왜 허상이라 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기억할 수 있을만큼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도 과연 '나'라는 것이 존재했는지 기억나시는지요? 저는 물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회과학적인 탐구를 통해서나 다른 학문을 통해서 밝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분야도 아니고 그런 탐구 방법이나 진실 해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글의 주제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 라는 중심성(?)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나이를 먹고, 지식 창고가 넓어짐에 따라 '나' 도 같이 굳건해져 왔습니다.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 보면, '나' 라고 인지했던 '그 어떤 시기' 이 전에는 순수한 삶의 본능에 의해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동물과 같은 상태였겠지요. 배 고프면 먹고, 마시고, 졸리면 자고, 생리적 부름에 응답하는 정말 단순한 생활의 반복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라는 인지가 생기기 시작하면 달라지게 됩니다. 다양한 사회 규범이나 생활 양식, 교육 내용과 수준, 주변 환경 등등에 따라서 조금씩 껍데기가 하나씩 들러 붙게되지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껍데기는 점점 두꺼워지고,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와 '나를 둘러싼 것'과 다른 것들은 철저하게 배제하기 시작합니다. 소통이 끊긴 상태, 배움이 중단된 상태로 변하는 겁니다. 늙으면 고집만 남는다는 말이 그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꺼워진 껍데기를 뚫고, 인간, 아니 만물의 원래의 모습인 '자연의 진정한 모습'으로 나아가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눈사람 만들때를 생각해 보지요.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 뭉치를 만들어야 할 때에는 작은 눈 뭉치을 만든 다음, 눈 밭을 오가면서 그 눈뭉치를 계속해서 굴리면 다른 눈이 붙고, 붙여서 큰 눈 뭉치를 만듭니다. 하지만, 기온이 올라서 그 눈이 녹으면 어떻게 되나요? 결국에는 '눈의 원래 모습인 자연 상태의 물'로 돌아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눈'이라는 물의 다른 모습이었던 때의 흔적조차 남지 않습니다. 눈은 물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눈'의 실제 모습은 '물'일 뿐이요, 물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이지요. 하지만, 물이라는 사실은 잊고서 '눈'에 대해서 집착하게 됩니다. 마치 영원할 것 처럼 말이지요.

  이처럼, '나' 라는 두꺼운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내고,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마음 공부를 하다 보면 원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좀 더 몀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라고 인지했던 모든 것이 '눈'과 같이 실제로는 진리의 다른 형태일 뿐이요, 봄이 오면 없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덧없이 사라질 '나' 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고통이고, 무지한 일임을 스스로 깨닫고, 진리(순리)에 맞추어 사는 것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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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공부를 하면서 가끔씩 '나'란 인식이 없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아니, '나'란 인지를 강하게 하는 것의 반증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전에는 이 '나=ego'가 사라지는 것이 '나란 존재' 자체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습니다만 이것 또한 실상이 아니었음을 눈치챘지요. 그 이 후에도 가끔씩은
'나'란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 지내오다가 문득 연말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케익을
계기로 해서 '나눔' 을 알게되었습니다.

  '나눔'이란 것이 '내가 가진 것을 나눈다'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아니란 것을 안 것입니다. '나눔' 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게 아니고
'나'가 사라지고 남는 진실한 모습이었습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나의 중심을 벗어난
'우리'로 향하는 것. 그것이 진실한 '나눔'입니다.

   '나=ego'가 사라짐으로써 외부로 나타나는 것이 나눔이라면
 내면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고 잘 바라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진리'였습니다. 자아를 찾는 분도 계시지만 '나' 자체가 허상일지니
그것이 사라져서 나타나는 것이 '또 다른 나' 일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나' 는 '나의 의지' 로는 결코 없애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일 겁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기를 간구하는 것이겠지요.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해를 돌아보면 역시나 여기 저기 '불통'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용산 참사', '미디어 법 날치기 통과 시도', '4대강 사업 추진','무상 급식 예산 삭감' 등등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여기 저기서 아픔이 느껴진 한 해였습니다.

  2010년에는 이런 '불통'의 시대를 조금이나마 '소통'의 시대로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대화'가 무엇이고 '소통'이 무엇이라고 잘 아시고 계실 겁니다.
'대화' 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내' 가 '다르지만 또 같다' 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바탕에서 서로의 합의할 수 있는 부분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다르다'는 것은 대화를 하는 목적을 바라보는 상대방과 나의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고,
'같다'는 것은 서로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대화 상대의 이익을 좀 더 가져오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극한으로 가는 것이 바로 '경쟁'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쟁'으로는 서로가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눔'. 이것이야말로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진정한 길입니다.한정되어 있는 자원을 지혜롭게 나눔으로써 우리 모두가 같이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나누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대화를 하고 소통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하겠습니다.

  대화를 하자고 하면서 이미 내린 결론을 들이밀면서 동의하라는 식의 대화 는 지양해야 하는 '폭력'입니다. 그것이 폭력이란 사실 조차 모르는 분들이 많으셔서 안타깝습니다. '좋은일인데 왜 동의하지 않느냐?' 는 식의 반론을 하는 분들을 보시면 서글퍼집니다. 나이는 벼슬이 아니라고 하는데 나이가 먹어도 조금도 어른이 되지 않는 분들입니다.

  우리 모두 조금 더 성숙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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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대화, 소통

"시크릿" 되새김질

2009/12/23 08:33 | Posted by Rkakd
'긍정' 이란 말을 들으니까 이전에 읽었던 '시크릿(Secret)' 이란 책이 기억납니다. 그 책이 베스트 셀러로 세간에 너~~얼~~리 읽혀졌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하는 "표면적인 주제"가 바로

"긍정적 사고"를 하면 그 생각대로 이루어지더라.

가 아니었나요? 하지만, 책이란 것이 잘못 읽히면 이 보다 더한 독이 없다는 생각을 해 준 최초의 책이 이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분들이 읽고, 좋은 책이라고 한 책을 저는 왜 ""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바로 오늘 되새김질해 보는 이유입니다.
  사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 책에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괴로운 현실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그 결과로서 당연히 얻어지는 것을 마치 요즘 휴대폰 회사의 광고 문구처럼

생각 대로 ~



하기만 하면 마술램프처럼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읖조리고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 인 사고 방식을 갖고 산다는 것은 좋은 자세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우주적 차원에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자연의 섭리란 것이 부정적인 에너지와 긍정적인 에너지가 각각의 유사한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 모이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가짜 긍정" 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감나무에서 감이 뚝하고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짜 긍정" 이 주는 문제점은 출발점이 틀리기에 그로 부터 파생되는 과정이나 결과까지 잘못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쓰레기장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꽃씨는 양질의 토질에 심어야 향기롭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진정한 긍정"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실을 정직하게 바라 보는 것', 즉, '관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관찰을 통해서만이 진정하게 바랄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모을 수 있고, 그것을 시작으로 한 나아감만이 진정하게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긍정의 의미마저도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이런 가짜 논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단히 깨어있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긍정 자체가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에 '진정하다' 는 둥 '가짜'라는 둥의 단어를 덧붙일 수 밖엔 없네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정한 것이 무엇이고 가짜가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마음 공부를 해 나가면서 서로 같이 공부를 하는 분들과 이런 저런 경험하거나
생각했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합니다. 분명 나와는 다른 존재로 인지하고 있지만
이야기 하는 것을 잘 듣고 있다보면

'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네 ?'

라거나

'아, 저 분도 다르지 않구나 !'

와 같은 느낌을 나누게 됩니다. 그러는 과정 중에서 타인과 내가 다른 존재가 아닌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다른 분이 경험했던 경우를 내 스스로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면 좋습니다. 흔히, 종교를 가진 분들을 대할 때의 선입견이 있듯이 마음 공부를 하면 마음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과 무언가는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라고 했지?'

 또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


등등이 그런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죽은 지식일 뿐입니다.

  마음 공부의 어려운 부분이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이 알아챘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과 동시에
다른 분 또는 자신이 이미 경험한 사실로서 알고 있는 것이나
 - 마음 공부 과정 중에서 알게 된 것을 포함해서 -
책에서 읽었던 내용, 또는 성현들의 말씀, 종교의 교리, 사회 규범 등등이
떠오른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 억제 시스템'이 내면에서 동작하는 것을
반증하는 겁니다. 이는 타율적인 것이지 마음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자주적인 삶'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 '자기 억제' 가 동작하는 그 순간을 바로 알아채고 정직하게 관찰하는 것이  죽은 지식이 아닌 지혜를 구하는 마음 공부입니다.
<= 이것도 지식입니다. ㅠㅠ

  결국, 개인 스스로가 자주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순간순간
자신을 관찰하면서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요즘 장안의 화제작 "2012"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재미있게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관에서 보시면 참 재미를 아실 겁니다.

 영화에 보시면 티벳의 노스님으로 보이는 분께서 어린 제자가 지구 멸망에 관련하여 걱정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시더니 가만히 차 주전자를 들어서 찻 잔 속에 차를 따르기 시작하십니다. 이윽고, 찻잔이 가득히 찼지만 스님께서는 따르는 것을 멈추지 아니하십니다.

 어린 스님이 놀라서

"스님, 찻물이 넘칩니다."

하시자 그제서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네 안에 생각이 가득 찼구나."

이런 장면... 다른 곳에도 가끔 등장은 합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되새겨봅니다.

 찻잔 속에 가득찬 찻물은 눈에 보이니까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 속에 가득한 생각은 알아채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도 제 자신 속에 생각이 가득찬 것을 알아채지 못했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니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제 속에 생각이 얼마나 차 있는지가 조금씩 보이고 느껴지고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이야기해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즉, 생각 자체가 얼마나 많은지를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었습니다만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는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물이 가득찬 찻잔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시지요.

찻잔에 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외부에서 진동이 전해짐에 따라서 찻잔 속 물 표면에 물결(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마음 속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파문이 있습니다.

  ''가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맛, 소식, 소리, 장면 등등 오감으로 인지하는
그 어떤 것으로 인해서 내 마음 속에서 관련한 생각이나 느낌이 따라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동일한 생각이 몇 시간, 몇 일, 혹은 몇 주간에 걸쳐서 주기적으로 다시 떠 오르기도 합니다. 친구 또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불쑥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그 때의 상황을 곱씹으면서 화가 날 때도 있고, 기분이 나빠지기도 합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곱지 않은 말이나 행동, 생각을 하는 자신을 알아채고 '이래선 안되지'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바로 내 '마음[찻잔]' 속이 '생각[찻물]'으로
채워져 있어서 발생하는 겁니다.

  '마음'이란 찻잔 속에 찻물인 '생각'이 비어져 있다면 외부에서의 흔들림에도 찻잔 속에는 파문이 발생할 일 없이 항상 고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생각을 비워나가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의 눈길로 정직하게 그런 자신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요즘 직장은 평가의 계절입니다.
상사 또는 동료 평가에 따라 움직이는 마음 속을 관찰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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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사랑입니다.

2009/11/22 08:59 | Posted by Rkakd
  지난 글타래 중,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에서 자녀 양육에 관해 언급을 하면서 제가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냥 많은 다른 의견 중의 하나라고 치부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시는 분 중에서 실제 자녀를 키우는 분의 유사한 사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직은 갓난둥이 아이를 두신 분이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거나 할 때가 있는데
그럴때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줄까를 고민하면서
이것 저것 시도를 많이 해 보셨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어떤 때는 모든 시도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럴때면 그 분 속이 많이 상했다고 하십니다.
무언지 모를 화(짜증)도 나셨을 테고요.
 
  그런데, 마음 공부를 하게 되면서 ''란 존재가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문제를 어렵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동일한 상황에 처하셔도
조급함이 일어나거나 속이 상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는 아이를 가만히 지켜보아 주고 있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느 새 울음을 그치고는 다시 잘 놀기도 하고,
어리광도 피우곤 한답니다.

  물론, 아이가 우는 것에 지쳐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고,
혹시, 가만히 지켜보다가 더 상황이 악화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점은 계속해서 '아이의 상태를 관찰'했다는 겁니다.

  "관찰"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만
자신의 섣부른 판단이나 주장, 생각 없이 가만히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소위 '어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관찰을 하다 보면 그 순간 필요로 한 것이 기다림인지 아니면 달래주는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답니다. 오히려 관찰(기다림) 없이 일단 달래고 보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해결이 아닌 또 다른 문제의 발달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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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관념)과 사실]

2009/11/19 16:10 | Posted by Rkakd
   마음 공부를 하면서 '본다(관찰)' 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늘 보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알게된
사례를 적어봅니다. 

1. 서점에서...

  영풍문고에서 책을 사려고 했을 때의 일입니다.
도서명을 적어서 갔습니다.
도서 조회 시스템을 통해서 책장 위치와 책의 대략 정보를 출력했습니다.
해당 책장은 6단 정도 되는 높이였고, 책들이 가득했습니다.
책을 찾기 위해서 위에서 아래로 주욱  제목을 훑었습니다.
찾지 못했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찾아 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서점 직원분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여기 있네요."

그 분이 책을 찾는데 1초 걸렸습니다.

2. 바보야, 하드디스크는 2.5 인치였어 !!

이전에 노트북을 사면서 하드 용량이 작다고 느껴서
좀 더 큰 용량의 하드를 하나 사 둔 것이 있었습니다만
노트북에 장착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하드에 맞는 외장 케이스가 없지 싶어서 
그냥 보관을 해 오던 차에 이번에 외장 케이스 제품이 나온것을
발견해서 기쁜 마음에 외장 케이스를 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두었지는 찾지 못하겠던 겁니다.
분명히 사무실 책상 속이 아니면 사무실 이전할 때 챙겨 둔
상자안에 있어야 할 터였습니다만 도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간을 찾아 헤매던 차에 드디어 찾았습니다.
하드디스크가 상자를 열자 마자 바로 눈 앞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ㅠㅠ

드디어 외장 케이스를 주문하였습니다.
주변에서 물어보았습니다. 1.8 인치 케이스를 주문했거든요.
전 자신있게 1.8 인치가 맞다고 했습니다.
물건이 왔고, 기쁜 마음에 하드를 케이스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맞지 않네?
1.8인치가 아니고 2.5인치였습니다.
분명, 주문하기 전에 하드디스크 모델을 보고 사양서도 다시 한 번
검색해서 찾아보았었습니다. 거기에는 2.5 인치라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검색해 보았습니다. 2.5 인치였습니다. ㅠㅠ

두 가지 경우 모두, 제가 보고 있었던 것은 
'빨리 찾고자 하는 생각(조급함)'과 '불완전한 기억' 이었습니다.
'사실'을 앞에 두고도 볼 수 없었습니다.

생각을 보고 있었으면서, 
'사실'을 보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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